장애자녀 부모가 된 워킹맘은 일과 양육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일과 장애자녀 양육을 병행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결정을 내려줄 수 없다. 자녀의 장애라는 문제가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부분 기관의 초기상담에서는 양육을 위해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치료나 교육의 과정이 매우 오랜 시간 소요된다는 점, 일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을 수도 있다는 조언을 해준다.

지니(가명, 필자의 자녀)가 20대 중반인 지금, 그 문제를 돌아보면 일찍 일을 접었던 그 결정에 대한 아쉬움은 있으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과 지니의 양육을 병행했다면 일을 하느라 혹시라도 시간을 지체하게 되어 놓치게 되는 치료나 교육이 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심리적인 압박감의 탈출구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특성으로 보아 개인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심리적인 충격과 업무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조화롭게 병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상존하고 있는 한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가 있든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중압감이 나를 주저앉게 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처한 상황이 현실이 맞는지를 늘 확인하면서 서둘러 치료와 교육을 받고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자는 생각만이 간절했었다.

치료와 교육에만 집중하기 위해 내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는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지내면서 내가 직장을 그만둔 그 결정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해 보기도 하였으며, 내가 했던 일들의 성격과 현실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나의 역량으로는 이전의 일과 양육의 병행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도 했다.

몇 차례의 초기상담을 받으며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아득해하고 있던 어느 날 신문 귀퉁이에 있는 언어치료 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다. 아주 친절하게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 H장애인복지관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주 가까이에 그것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그런 기관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H장애인복지관에서는 그곳에서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 안내를 해주었고 지니가 아직은 어리니, 만3세가 되는 달에 놀이치료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다행히 처음 시작한 놀이치료에 지니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치료실에 있는 작고 앙증맞은 피규어로 꾸며진 예쁜 모형 방을 앞에 두고 선생님의 시범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작은 인형에게 옷과 신발을 입혀보고 벗겨보기도 하며 방을 꾸미는 놀이에 집중하였다. 3회기가 지났을 때 놀이치료선생님이 희망을 주었다.

“지니는 힘이 있어요. 지니는 잘 될 것 같아요.”
“첫날에 청소기 소리를 싫어하더니, 두 번째 날에는 괜찮아졌어요.”

지니의 반응을 기다리며 무작정 흘러가는 시간이 불안하여, 뭔가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늦은 밤에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잠들지 않는 지니를 재우기 위해 불을 끄고 컴컴한 방에 누워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잠들기 일쑤였다. ‘곰 세 마리’, ‘뽀뽀뽀’, ‘ABC송’ 등 아주 단순한 멜로디의 노래를 불러주며 토닥토닥 두드려주면 편안해 하는 것 같았다.

낮은 책상 위에 이면지, 계절이 지난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지니를 품에 앉히고 연필을 쥐어 준 지니의 작은 손 위로 내 손을 포개어 선긋기 놀이를 시작했다. 천천히 대상을 말로 표현하면서 선긋기에 이어,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리다가 동그라미에서 사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하나가 머리가 되고, 몸이 생겨나고, 길게 이어져서 팔과 다리가 된다. 다시 그린 동그라미에 얼굴, 눈, 코, 입, 귀를 그려 넣는다. 다시 손을 대면 더 구체화 되어 눈, 눈썹, 속눈썹, 코, 입, 입술. 귀, 귀걸이, 목, 목걸이, 셔츠, 단추, 바지, 원피스, 운동화, 구두 등등으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점점 세밀하게 묘사하고, 이런 저런 옷을 입혀보기도 하고, 장식을 하고, 색을 입히면서 그리는 대상에 대해 단어와 문장을 구사하면서 활동을 확장해 나갔다. 엄마, 아빠, 오빠,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와 어른 등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했으며 필자는 그림으로 지니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장애아의 치료와 교육은 소통관계 형성으로서 시작된다.

정은미 박사 / 한국장애인가족문화연구소장  jem9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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