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 빠지다, 이야기 만들기의 시작

정은미 교육학 박사 / 한국장애인가족문화연구소장
승인 2018.04.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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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기 전까지 육아에 대한 지식도 일천하였고, 장애에 대해 무지하였으므로 최대한 지니(가명, 필자의 자녀)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월트 디즈니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로 시작하여 ‘피노키오(1940)’, ‘판타지아(1940)’,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팬(1953)’, ‘잠자는 숲속의 미녀(1959)’, 101마리 달마시안(1961)‘, ‘인어공주(1989)’, ‘알라딘(1992)’, ‘미녀와 야수(1994)’, ‘라이온킹(1994)’, ‘포카혼타스(1995)’, ‘뮬란(1998)’, ‘타잔(1999)’ 등으로 이어지는 명작들을 제작 발표한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과 함께 지니가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니는 디즈니에 이어 픽사(Pixar) 애니메이션 영화 시리즈도 대부분 섭렵했다.

그 당시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비디오로 계속 출시가 되었는데, 영어회화용으로 또는 아동들의 교육용이라는 명분으로 디즈니 고전 비디오 해적판들이 무분별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지식소유권 침해로 인한 제작자들의 피해에 주목하기보다 비디오테이프로, 이후 컴퓨터 운영체제 윈도의 등장으로 CD로, DVD로 간단하게 복사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을 더 신기해했었다.
디즈니와 픽사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의 표정이 섬세하고 풍부하게 표현되었으며, 생동감 있고 동작 묘사가 빠르고 재미있어서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의 욕구나 감정은 같다고 생각했다.

유아들이 비디오 시청에 빠져드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나는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는(할 줄 모르는) 지니가 애니메이션에 몰입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정이 없이 혼자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욕구의 표현이다. 지니가 욕구를 표현한다는 것을 긍정적인 현상으로 생각했고 이를 중요한 사실로 여겼다.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할 줄 모르던 지니가 스토리 전개에 따라 얼굴로 몸으로 느낌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어쩌다 너무 우스운지 벌떡 일어나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심지어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밥을 먹다가도 그 장면 생각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킥 웃어 젖힌다. 심각한 장면에서는 표정과 온몸을 쪼그리며 상체를 구부리다가 급기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간신히 뜬 실눈만 빼꼼 드러내고 화면을 응시한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오두막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을 그린 애니메이션의 장면들, 꾀 많은 생쥐 제리에게 터무니없이 당하는 우둔한 고양이 톰의 빠르게 지나가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 야수에게 잡혀간 미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웅다웅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쏟아내었다.

지니가 감정을 표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별도의 TV, VTR을 마련해주고 자유롭게 애니메이션을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이후에는 새로 출시된 비디오테이프 구매하기, 서점에서 같은 애니메이션 그림책 구매하기, 서점에서 책 탐색하기, 책 만들기 활동으로 확장이 되었다. 서점에는 출시된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한 서적이 아이들의 연령과 수준, 그림의 크기, 책의 두께에 따라 다양하게 출판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이렇게 구매한 책들은 닳아서 책장이 너덜너덜 떨어져 버릴 정도로 많이 보았다. 그러면서 책 만들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혼자 놀기의 시간은 결코 무관심하게 내버려 진 시간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를 가꾸어 나가는 방식이 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아이들에게도 필요하다.

언제부턴가 얼굴에서는 환하게 표정이 살아나고 있었다. 1년쯤 지났을 때 표정이 없었던 지니의 얼굴이 달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애니메이션 보기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웃음 치료 효과였다.

그러나 주변의 시각은 나와는 달랐다. 지니가 어렸을 때 디즈니사 애니메이션을 자주 보여주었다는 말 한마디에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가 그런 것이었다.

우연한 자리에서 지니가 특수교육을 받았으며 어렸을 때 비디오를 많이 보았노라는 말을 했다. 비디오를 보며 많은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그런 상황들을 표현하며, 실제와 연결하는 것 같더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육아 전문가들이 ‘비디오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유아들이 오랜 시간 비디오를 보는 것에 대한 우려를 매스컴을 통해 들을 수 있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릴 때 특수교육 프로그램인 조기교실에 다니며 통합어린이집에서는 볼 수 없는 자신감이 고취되는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했을 때, 장애아 교육에 오랜 경험이 있는 한 교육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애를 자폐아로 만들었구먼.”
“자폐성 장애아에게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의사소통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 통합교육이지요.”
“장애아들끼리 있는 조기교실에서 아이가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마치 내가 아이를 망가뜨린 부모가 된 것만 같았다.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아 자폐아가 되었을까? 무엇이 원인이 되고 무엇이 결과가 되었는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원인을 알면 대책을 세우고 답을 구할 수 있다. 자폐 성향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선택적 집중력이 뛰어나다. 아이들의 이런 성향을 결함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강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우리 교육현장에는 특성을 강점으로 보고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며,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