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종합복지신문 정은미 박사] 지니(가명, 필자의 자녀)는 오빠와 1년 6개월의 터울을 두고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가 딸이라고 간호사가 말해 주었을 때, 마치 인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친구를 얻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지니의 임신과 출산으로 1년 가까이 헤어졌던 오빠는 지니가 5개월 되었을 때 함께 지내게 되었다. 오빠는 엄마를 다시 만났지만, 처음 보는 동생으로 인해 엄마의 관심과 사랑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랬기 때문인지 활동반경이 컸던 오빠에게서 지니를 지켜줘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과자를 집으려는 지니의 여린 손가락을 인정사정없이 깨물어버린다든가, 식탁의자에 앉아있는 지니를 떠밀어 아래로 떨어뜨린다던가, 기어가는 지니의 등을 깨물어 선명한 이빨자국을 남기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사랑으로 시작된 육아는 적이 없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17개월이 되었을 때 이사를 했다. 주변 환경이 바뀌자 지니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집 밖으로 나가려 할 때면 현관 문틀을 잡으며 나가기를 거부하거나, 이웃사람들에게도 낯을 많이 가렸다. 작은 아파트여서 거실을 중심으로 한눈에 모든 구조가 들어오는 공간이었는데, 잠시라도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는 자지러지게 울며 불안해하여 화장실 갈 때도, 세수하고 머리를 감을 때도 지니를 등에 업고 있어야했다. 한밤 취침시간도 매우 늦어 잠을 재우는 것도 여간 수고스럽지가 않았으며, 잠들 때까지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지니보다 한 달 정도 늦게 태어난 이웃의 또래 남자아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방긋방긋 웃으며 말문을 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말이 늦어지는 것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마냥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여 주변탐색을 시작하였다. 직장동료가 친구의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C기관을 추천하였다. 지니가 19개월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직은 어리니 더 기다려 보아야 하지만, 특별한 교육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2~3개월의 간격을 두고 두어 곳에서 상담을 받았으나, 그 기간 동안 상담내용이나 지니의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지니가 23개월이 되었을 무렵, 전문가의 진단을 받기 위해 S병원 유명 소아정신과의사를 찾아갔다. 말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두 돌이 아직 지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늦게 말하는 아이도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고만 하셨다. 그 외에는 기억에 남아있을 만큼 특별한 것이 있지 않다. 지니가 반응이 없는 것에 대한 이유와 정확한 병명이나 진단명을 받기를 원했는지 2년이 지나서 2회 더 상담을 받았던 진료기록을 최근에 확인하였다. 그 당시는 몰랐었던 Autism(자폐증), Developmental lag(발달 지연), PDD(전반적발달장애). MR(지적장애). PLD가 기록 중에 있는 것을 보았다.

예쁜 아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야릇하게 행동하는 것이 장애라고 했다.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니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사실도 도대체 현실감이 없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거짓말같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머릿속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어보기도 했다. 몇 주가 지나갔다. 예쁜 아이를 다시금 보지만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공포가 엄습해왔고, 다른 기관에 상담 신청을 했다.

이 모든 현실을 부정하고 돌아보지 않는다하여도, 내 앞에 펼쳐진 사실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빨리 인정하고 서둘러 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지니가 2.5세 때, 주1회 12회기 부모교육을 받았다. 매주 버스, 전철, 택시를 갈아타며 오빠 없이 단둘의 나들이를 했다. 기관에서는 부모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2시간의 교육시간 내내 지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없이 홀로 남겨진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낯선 놀이방과 낯선 아이들, 낯선 봉사자들이 가득한 방안에서 오는 공포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1~12주차에 접어들어서야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부모교육을 받으며, 장애인복지관에 다니고 있다. 이전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내 앞에 펼쳐졌고, 이런 일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밤새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던 것이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다시는 이전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육아의 짐을 벗으며 얻게 되는 자유가 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줄어든 수입과 감당해야 할 치료·교육비의 무게로 평생 허덕이며 살지도 모른다. 이런 삶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남은 날이 너무 길다고 느껴졌다. 여러 생각들이 나를 짓눌렀다.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H장애인복지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교육이 시작되었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모성본능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남은 날에 대한 끔찍한 열등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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